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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一心精到 豈不成功
卍 금강경 卍

이상적멸분 제14권 = 상을 여윈 적멸

by 一切唯心造 108 2013. 3. 15.

離相寂滅分 이상적멸분 第十四권
상을 여윈 적멸

 

爾時에 須菩提 聞說是經하고 深解義趣하여 涕淚悲泣하며 而白佛言하되
이시에 수보리 문설시경하고 심해의취하여 체루비읍하며 이백불언하되

希有世尊이시여 佛說如是 甚深經典은 我從昔來所 得慧眼으로
희유세존이시여 불설여시 심심경전은 아종석래소 득해안으로

未曾得聞 如是之經 이니이다. 世尊이시여 若復有人 得聞是經하고

미증득문 여시지경 이니이다. 세존이시여 약부유인 득문시경하고

信心淸淨하면 卽生實相하니라 當知是人은 成就第一 希有功德이니이다.
신심청정하면 즉생실상하니라 당지시인은 성취제일 희유공덕이니이다.

世尊이시여 是實相者는 卽是非相일새 卽是로 如來說名實相이니이다.
세존이시여 시실상자는 즉시비상일새 시고로 여래설명실상이니이다.

(해설)

그때에 수보리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깊이 이뜻을 깨달아, 눈물을 흘려 슬피 울며 

부처님께 사루어 말씀하되, 희유 하십니다. 세존 이시여. 부처님 께서 이와같이

심히 깊은 경전을 설 하심은, 제가 예로 부터 오면서 얻은바 지혜의 눈으로는

일찌기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듣지 못하였나이다. 세존 이시어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신심이 청정 하면 곧 실상이 나리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 한줄로 마땅히 알겠나이다. 세존 이시어 실다운 상 이라는 것은,

곧 이 상이 아닌지라 이런고로 여래 께서 말씀 하시되, 이름을 실상이라 하셨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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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尊이시여 我今得聞 如是經典하고 信解受持는 不足爲難이어니와 若當來世 
세존이시여 아금득문 여시경전하고 신해수지는 부족위난이어니와 약당래세

後五百歲에 其有衆生이 得聞是經하고 信解受持하면 是人은 卽爲第一希有이니다.
후오백세에 기유중생이 득문시경하고 신해수지하면 시인은 즉위제일희유이니다.

何以故오 此人은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 所以者何오
하이고오 차인은 무아상하며 무인상하며 무중생상하며 무수자상이니 소이자하오

我相이 卽是非相이며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卽是非相이니 何以故오 離一切諸相이
아상이 즉시비상이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즉시비상이니 하이고오 이일체제상이

卽名諸佛일새니다. 佛告須菩提하시되 如是如是하니라 若復有人이 得聞是經하고
즉명제불일새니다. 불고수보리하시되 여시여시하니라 약부유인이 득문시경하고

不驚不怖不畏하면 當知是人은 甚爲希有니 何以故오 須菩提야 如來說第一波羅蜜은
불경불포불외하면 당지시인은 심위희유니 하이고오 수보리야 여래설제일바라밀은

卽非第一波羅蜜이요 是名第一波羅蜜일새니라.
즉비제일바라밀이요 시명제일바라밀일새니라.

(해설)

세존 이시여, 내가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알고 받아 가지기는

족히 어렵지 않거니와, 만일 당래세인 후 오백세에 있는 중생들이, 이 경을 얻어듣고,
신해수지하는 이 사람은 곧 제일 희유함이 될지니, 어찌한 연고이냐, 하면, 이사람은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중생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는 까닭 입니다. 이 소이가 무엇

일까요 아상이 곧 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곧 상이 아닙니다. 어찌한

연고이뇨. 모든 상을 여의어사, 곧 이름이 부처인 까닭입니다. 부처님 께서

수보리 에게 고 하시되, 그렇다 그렇다,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듣고,
놀라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고 두려워 하지도 않으면, 마땅히알라, 이사람은 매우

희유함이 되나니라. 어찌한 연고이냐, 수보리야. 여래가 제일 바라밀이라 말한 것도,
제일 바라밀이 아니요, 이 이름이 제일 바라밀 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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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야 忍辱波羅蜜도 如來說非忍辱波羅蜜이요 是名 忍辱波羅蜜이니 何以故오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설비인욕바라밀이요 시명 인욕바라밀이니 하이고오

須菩提야 如我昔爲歌利王에 割截身體로되 我於爾時에 無我相이며 無人相이며
수보리야 여아석위가리왕에 활절신체로되 아어이시에 무아상이며 무인상이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 何以故오 我於往昔 節節支解時에 若有我相 人相 衆生相
무중생상하며 무수자상이니 하이고오 아어왕석 절절지해시에 약유아상 인상 중생상

壽者相이면 應生瞋恨 일새니라.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作忍辱仙人하여
수자상이면 응생진한 일새니라. 수보리야 우념과거어오백세에 작인욕선인하여

於爾所世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 是故로 須菩提야
어이서세에 무아상하며 무인상하며 무중생상하며 무수자상이니 시고로 수보리야

菩薩 應離一切相하고 發阿? 多羅三? 三菩提心하되 不應住色하고 生心하며
보살 응리일체상하고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하되 불응주색하고 생심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하고 生心하여 應生無所住心이니라.
불응주성향미촉법하고 생심하여 응생무소주심이니라.

(해설)

수보리야 인욕 바라밀도 인욕 바라밀이 아니요, 이 이름이 인욕 바라밀 이라고,

여래가 말 하였느니라. 어찌한 연고이냐. 수보리야 내가 옛적 가리왕 에게 신체를

베이고, 끊음을 당하였으되, 내가 그 때에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이 없었나니,어찌한 연고이냐, 내가 지나간날 마디마디 사지를

찢길때에,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니라.수보리야 또 생각하니 과거 오백세에 인욕선인이 되었던
그 세상에서도 아상 인상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더니라. 이런고로 수보리야,

보살이 응당 모든상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 삼보리심 을 발할 것이니 응당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응당히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말며.

마땅히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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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心有住하면 卽爲非住니 是故로 佛說 菩薩心은 不應住色布施라 하니라

약심유주하면 즉위비주니 시고로 불설 보살심은 불응주색보시라 하니라.

須菩提야 菩薩이 爲利益一切衆生하여 應如是布施니 如來說 一切諸相은
수보리야 보살이 위이익일체중생하여 응여시보시니 여래설 일체제상은

卽是非相이며 又說一切衆生은 卽非衆生이니라.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즉시비상이며 우설일체중생은 즉비중생이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시진어자며
實語者며 不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니라.
실어자며 불광어자며 불이어자니라. 수보리야 여래소득법은 차법이 무실무허니라.

須菩提야 若菩薩이 心住於法하여 而行布施하면 如人入闇에 卽無所見이어니와
수보리야 약보살이 심주어법하여 이행보시하면 여인입암에 즉무소견이어니와
若菩薩이 心佛住法하여 而行布施하면 如人有目커던 日光明照하여 見種種色이니라.
약보살이 심불주법하여 이행보시하면 여인유목커던 일광명조하여 견종종색이니라.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若有善男子 善女人이 能於此經에 受持讀誦하면
수보리야 당래지세에 약유선남자 선여인이 능어차경에 수지독송하면

卽爲如來 以佛智慧로 悉知是人하면 悉見是人하여 皆得成就 無量無邊功德하나니라.
즉위여래 이불지혜로 실지시인하면 실견시인하여 개득성취 무량무변공덕하나니라.

(해설)

만약 마음에 주가 있으면 곧 주 아님이 되나이다 이러므로 불이 말씀 하시되,
보살은 마음을 응당 색에 주 하지않고,보시 한다 하니 수보리야 보살이 여러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 하나니라. 여래가 말한 모든 제상도,

곧 이 상이 아니며, 또 말한 여러 중생도,곧 중생이 아니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참다운 말을 하는 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자며, 같은 말을 하는 자며, 속이는 말을

않는 자며, 다른말을 하지 않는자 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바 법은 이법이

실도없고 허도 없나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주하여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어둔데 들어감에, 보이는 바가 없는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주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눈이 있고 햇빛이 밝게 비치어, 가지 가지의

색을 보는 것과 같나니라. 수보리야 마땅히 오는 세상에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능히 이경을 수지독송 하면, 곧여래가 큰 지혜로써 이사람을 다알고 이사람을 다보아,
한량이 없고 가 없는 공덕을 얻어 성취함이 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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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이상적멸분 제14  _((()))_


※ 해석.

수보리는 부처님의 오백제자 가운데 공 의 이치를 깨침이 제일이라 하였거니,

어찌 이런 법을 처음 알리요마는, 깨침도 심천이 있고 앎도 차별이 있는 것이라,
슬픔이 극하면 웃음이 나오고 기쁨이 극하면 도리어 눈물이 나오는 것이니, 이번과 같이

부처님께서 크고,크고,깊고 깊은, 법을 간절 하시고 곡진 하신 대자대비 심으로 설하심을

듣고, 법에대한 희열을 더 한층 깊게 깨치며, 불은에 대한 감사를 더한층 느끼어, 울며

부처님께 사루되, 지금까지 제가 알아온 지혜의 눈으로는 일찌기 이러한 경을 얻어듣지

못 하였다고 감사의 말씀을 뼈저리게 올린 것이다.

 

이경의 뜻을 얻어 듣고 신심만 청정 하면 이 사람은 곧 실상을 보게 되나니, 신심은 거짓이

없고 참답기 때문이다. 참답기 때문에 실다운 상을 얻게 된다, 실다운 상은, 상과 상 아닌데

걸림이 없고, 있고 없음에 걸림이 없고, 주와 무주에 걸림이 없고, 공덕과 비공덕 에도

걸림이 없어서, 이것이 실상이니, 이 경을 듣고 신심이 깨끗하게 된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이 아닌,공덕을 성취한 사람인 것이다. 실상 이라는 것은, 말에 있지않고, 문자에 있지

않고,명상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말이나 문자나, 명상이, 또한 실상인 것도

알아야 한다.

 


이경을 신해수지 하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게 있는 사람이다. 왜냐 하면 이 사람은 상을

여윈 사람 이니, 상을 여윈 사람은 곧 부처이기 때문이다. 문자에 있지 않고,명상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것이 상을 여임이 되는가. 상에 착하면 착한 상이요, 상을 여의면

여인상 이니, 착하고 여인 상을 놓아 버려야, 이것이 일체 제상을 여인 것이 된다.
상을 떠나서 상을 여일려 말라. 부처님 께서 수보리의 말씀을 긍정 하시었다.
그리고 이경을 듣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매우 희유 하다고 찬탄 하시었다.물 속에서 불이

일어나고 불 속 에서 연꽃이 피면,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인가, 이 경의 처음부터, 만약 보살이 사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 말씀 하시어,

사상을 여의어야 할것을 여러번 부탁 하시고, 이제 와서는 아상이 곳 상이 아니요, 인상,

중생상,수자상도, 상이 아니라 말씀을 하시니, 이런 말씀을 듣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심히 희유 한 사람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자기의 본심만 본 사람이면, 그리 희유하다 할것이 없는 것이다. 상이라 하거나,
상이 아니라 하거나 그놈이 그놈 이요,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일 바라밀은 보시 바라밀을

말씀한 것이나. 신심이 깨끗하여 실다운 상을 본 사람은, 보시가, 보시가 아닌 것이니,

줄 사람도 없고, 받을 사람도 없고, 주고 받을 물건 이나, 법도 없는 까닭 이요,
바라밀 이라는 저언덕에 이르는 것도 없을 지니, 이 언덕이 없는지라 저 언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가리는 번역 하여 극악 하다는 뜻이니, 옛날 인도에 가리왕이 있었고,

부처님은 그때에 인욕행을 닦는 선인이 되시었다 한다.


하루는 가리왕이 산중에서 사냥을 하다가, 곤하여 잠을 자고 깨어본즉, 시녀들이 한사람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리저리 찿아본즉도 이 시녀 들은, 어떤 선인이 편안히 앉아 있는곳을

둘러싸고, 예배를 드리고 있거늘, 왕은 크게 노하여, (그대는 어찌하여 방자히 남의 여색을

탐내는가) 선인이 말하기를, 나는 인욕계를 갖는다고 대답 하였더니, 왕은 칼로 선인의

몸을 오리고, 끊고 하였으나, 선인은 엄연히 안색을 불변하고, 가리왕을 원망하는 생각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경에 있다. 모기만 물어도 가려움을 느껴,견디기 어려웁거늘, 어찌

칼로서 찌르고 끊고,도리고 함을 참아서,견딜수가 있을 것인가. 참는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선인은 활절신체를 당할 때에도 가리왕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선인 이라는

내가 없거니, 선인을 해칠 가리왕이 있을수 없는것이다.


부처의 몸을 칼로서 베인다는 것은 번개빛 그림자 속에 봄바람을 베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들이 편안히 살려면 마음이 고요 하여야 하나니, 마음이 고요 하려 면 싸우지 않어야

하고 싸우지 않으려면 시비가 없어야 하고,시비가 없으려면 분별이 없어야 하고 분별이

없으려면 마음이 공하여야 하고 마음을 비우고져 하면 일체 상이 없어야 하고, 모든상을

여의려면 이마음을 붙잡아 놓아야 하고, 이마음을 붙잡아 놓으려면 이마음을 붙잡아

매일주처, 즉 머물러 있을곳을 정하여 놓아야 한다. 이마음의 주처를 정하여 붙잡아 매지

않고는 시끄러워 살수가 없는 것이다. 편안치 못하고 편안치 못하면 괴로웁고, 괴로우면

잘사는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이 경의 법문이 맨 첫 머리에서 수보리 가, 부처님께 어떻게 그마음을 머므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 하는 물음으로 부터 시작하여, 이경 전부가 이뜻을 묻고

대답한 것으로 마치는 것이니, 부처님이 일체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잘 살도록 건지려는
대자 대비심이, 이토록 간절 하심을 알수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이마음을 어데다

붓잡어 매어 그 주처를 정하여 줄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이 잘살아 보려는데 가장 중요 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부처님 께서는 수보리에게 이렇게 말씀 하시었다. (당연히 모든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 삼보리심을 발하여야 한다) 고. 다시 말하면 육진 경계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말고 주한바없는 마음을 내라는 말씀이시다. 또다시 자세히 말하면, 크고 작고

밝고 어둡고 밉고 곱고 깨끗하고 더러웁고 친하고 서먹하고 착하고 악하고 괴로웁고 즐겁고

지혜있고 미련하고 성현이고 범부이고 참이고 거짓이고 상이고 상 아니고 쓰고 못쓰고

고르고 옳고 낳고 죽고 이러한등, 모든 일체 상을 여의고 그 마음을 쓰라는 말씀 이시다.


이 소이는 무엇인가 하면 이법이 원래 정해진 법이 없고, 이마음이 본래 정해진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마음이 어데 한군데나 한 물건에나 주하고 있다 하면,
이것은 이마음의 참 주처가 못되는 것이니. 마음의 주처는, 무주처가 주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주라고 하는말은, 무주에도 주함이 없는, 무주에 주하는것이, 마음의 주처라는

말이니, 주가 없으므로 일체 상을 여의고, 주가 없으므로 모든상을 놓아두게 될새,
우리의 마음을 이 무주에다 붙잡어 매어,놓으면,이것이 주가된다. 주가 된다는 말은,

마음이 제자리에 있게 된다는 뜻이니, 마음이 제자리에 있게 되면, 종일 먹어도 먹는것이

아니요, 종일 입어도 입는것이 아니요 종일 가도 가는것이 아니요, 종일 울어도 우는것이

아니요, 종일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요 종일 보아도 보는것이 아니요, 종일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므로, 언제나 마음은 제자리 즉, 무주에 주하게 되는것이다.


색에 주하는것만 상이 아니라, 색에 주하지 않는것도 상이니, 보시 한다는 것도 상이며,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는 것도 상이니, 어떻게 하는것이 상에 주 하지않는 보시 일가.
상이 상 아닌줄 알면,이것이 곳 상에 주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는것이 상이 상 아닌것이

되는가, 이 세계는 상 밖에 한 물건도 없기 때문이니, 상이다 상 아니다 하는 이것이

무엇일가. 그리고 또 이 상이 어디서 나왔을가 모두가 이 것이다. 이것도 이 것이요,

저것도 이 것이다. 산과산, 물과물이,다 진여 아님이 없고, 꽃과 꽃, 풀과 풀이 무엇하나

반야가 아니랴! 마음만 제자리 에다 주 하여 보라.무엇하나 딴 물건이 있을 것인가,
주 한다 하여도 이것이요, 주 하지 않는다 하여도 이것이요, 상에 착한다 하여도 이것이요

상을 여이었다 하여도 이것이요. 번뇌라 하여도 이것이요 보리라 하여도 이것이요, 거짓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참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열반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생사라 하여도

이것이요, 지옥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천당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불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중생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있다 하여도 이것이요, 없다 하여도 이것이요, 마음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마음 아니라 하여도 이것 이니, 이것 밖에는 한 물건도 없는 것인줄 믿어서 알면,
이것이 곳 상이 상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모든 상으로써 보시할 지라도, 이것은 부주상 보시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보살들은 여러 중생들을 위하여 허공과 같이 보시를 하나니라. 모든 제상도 상이

아니고, 여러 중생도 중생이 아니면, 무엇 이겠는가 생각 하여 보라. 이 말씀에서 부처님의

뜻이 어데 있는가를 알수 있다. 무엇 때문에 금강 반야바라 밀경을 설 하시었는가.
중생의 병이 있기 때문이다. 중생의 병이 어찌 하나 둘 뿐 이리요 마는, 천병 만병의

근원이 집착하는 데에서 원인이 된 것이요. 집착하는 원인은 내가있기 때문이니, 이병을

고치는 데는, 나를 놓아 버리는것 밖에는 아무 약이 없다.  그러나 이약을 먹을 사람은

고금을 통하여 만에 하나 있기가 어려웁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나를 놓아 버리면,
천하만사가 소용없기 때문이다.


내가 없으면, 좋은 음식도 못먹고, 좋은옷도 못입고, 좋은 물건도 못가지고,

좋은 벼슬도 못살고, 애인도 못보고, 즐거운 음악도 못듣고, 좋은 법도 못배우고,
아들도 없고 손자도 없고, 부처도 없고, 천당도 없을 것인데, 어떻게 나를 놓아 버릴수가

있을 것인가 말이다. 정말로 나를 놓아 버리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약을 먹지

않고는 도저히 중생들의 병을 고칠수가 없을새, 부처님께서 천언 만언으로써 이약을

먹이고저 노바심절 고구정녕 하시었으니, 동쪽을 들어서 모르는 사람 에게는 서쪽을 들어

말씀 하시고, 서쪽을 보여도 모르는 사람 에게는 남쪽을 보이시고, 남쪽을 일러도 모르는

사람 에게는 북쪽을 말 하시며, 동서남북을 고집하여 모르는 사람 에게는 동서남북이

없는것을 들어 말씀 하시고, 없는것에 고집 하는 자 에게는 있는것도 없다.


말씀 하시고, 상에 고집하여 상으로써 부처를 보려 하는자 에게는 상을 여이어사 부처를

보는것을 말씀 하시고, 상을 떠나서 부처가 따로 있는 줄로 고집하는 자 에게는 상이

곧 부처임을 말씀 하시고, 있는 것에 걸린놈은 없는약을 주시고, 없는것에 체한놈은 있는

약을 주시고 있도 없도 않은데 체한 놈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약을 주시어, 하나도

일정한 약이 없고, 하나도 일정한 화제가 없는것이, 이 경의 설법 이시나, 요 는 나를 버리는

데에 필요한 약 방문이다. 나를놓아 버리라 하심은 나를 놓아서 참나, 참으로 큰나,
참 으로 영원 불멸인,실다운 나를 얻기 때문이다. 이 얻음은 얻음이 없이 얻는 것이다.


이 대문에서 여래는 참 말을 하는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여여한 말을 하는 자며,

속이는 말을 않는자며, 다른말을 않는 자라고 다섯번이나 말씀 하신데서, 우리는 더욱

처님의, 중생을 위하시는 간절하신 마음과 고심 되는, 모습과 이 법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과, 중생들의 근기가 얼마나 열한가를 절실히 짐작 할수있다. 참 말은 말이

없는 것이어늘, 여래는 부득이 참 말이라고 말씀 하시고, 참 말이라고 하여도 중생이 믿지

아니할가 염려 되시어, 또 다시 실다운 말 이라고 하시고, 그리고도 또 못믿어 다른말을

않는다고 당부 하시 었으니, 참말로 곧 실다운 말이요, 여여한 말이요,속이지 않는 말이요,

다른말이 아니어늘, 이렇게 다섯번이나 같은 말을 중복 하심은 이토록 중생을 위하심이
간곡하신 뜻에서, 행여나 이법을 믿지 않을가 하는염려가 크시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말만 떨어지면 병을 이루나니, 이것이 상을 여이지 못한 소이 이다.
그러므로 실을 말하면 실병이 되고, 허를 말하면 허병이 될새, 실과 허가 둘다 없는 근본을

들어서 밝히시니, 실이 있으면 실 아닌 허가 있는것이요, 허가 있으면 허 아닌 실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마음을 주 하는법이 못되는 것이요, 실과 허를 둘다 놓아사, 이것이 참으로

마음을 주하는 법이요, 이것이 참으로 실과 허를 자유 자재로 쓰는 아뇩보리법이요,
이것이 참으로 반야바라 밀법이요, 이것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법인 것이다. 보는 것으로써

보는 것을 삼으면 보이지 않는것이 많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써 보는것을 삼으면 안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이니, 주하고,주하지 않는 보시의 차이가 이만큼 다른것을 말씀 하신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물에다 소금을 치면 짜고, 초를 치면 시고, 설탕을 풀면 달고,쓴것을 넣으면

쓰고, 기름을 치면 고소하고, 고추를 넣으면 맵다.


그리하여 이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짜다, 시다, 달다, 쓰다, 고소하다, 맵다고, 제각기

말하고 있으나, 물의 본맛은 시고, 달고, 짜고, 맵고, 쓰고, 고소한 것이 아니요, 담담 하여

아무맛도 없는 것이 물의 본맛 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맛있는 물들을 즐겨 다투어 마시고,

이 아무맛 없는 본 물의 본맛을 즐기는 자는 매우 드물다. 이와 같이 아무것도 섞지않은

본연 청정의 법 아닌 법을 설한, 심심미묘한 이경을 수지독송 하는 사람이야 말로,
물의 본맛을 즐기는 자이니, 이는곳 자기의 깨끗한 본심을 증득한 사람이므로, 부처가

곧 이사람 이다. 내가 부처요, 부처가 곧 나이기 때문에, 여래가 이사람을 다 알고 다보아,
무량 무변의 공덕을 성취 한다는 말씀 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