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一心精到 豈不成功
卍 불교 공부 卍

삼법인 (三法印)

by 一切唯心造 108 2015. 5. 5.

 삼법인 (三法印)

 

 1,제행무상 (諸行無常)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한다는 뜻이다.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서

 단 한 순간의 머무름도 없이 변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제행, 곧 생멸(生滅)변화하는 모든 현상은

정신이나 물질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변화한다는 원리이다.

 

어느것 하나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는 영원 불변하는 진리이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라도

마침내는 죽는다는 진리이다.

 

모든 현상계의 사물은 그 어느 하나도

 시간적인 면에서 볼 때,

 

항상 한 것이 찰라에

생멸변화 (生滅變化) 한다는 것이다.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어야 하며 생자필멸 (生者必滅),

 만난 자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하는 것 회자정리(會者定離)

  무상의 원리인 것이다.

 

인생으로서  생·노·병·사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의술이 발달한다고 하여도 인간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물 또한 무상의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조그마한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는 (生)하고,

 

잠시 그 수명대로 머물다가 (住] 형체가 변하고

 달라져서[異, 變], 없어지고 [滅]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바탕이 되고 있는

 물질적 요소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석존 당시의 인도 사상계에서는

 (地)·(水)·(火)·(風)과 같은 요소는

 불변적 존재 (不變的 存在) 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석존은 그것

또한 무상한 것임을 역설하고 계신다.

 

현대의 자연 과학에서는 원소 (元素)

원자 (原子) 로 분석되고 원자 또한 파괴되며,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 (素粒子)

 불변의 존재는 아니라고 한다.

 

에너지불변의 법칙이 있지만, 에너지가 물질로

변할 수 있고 물질이 에너지로 변할 수 있다면,

이것 또한 제행무상의 원리가 아니겠는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으로 믿던 사람의 마음도,

부귀영화도 어느덧 변하고 마는 것이며,

 

 젊음과 건강을 자랑하던 젊은이도,

뛰어난 미모를 뽐내던 미인도 무상의

 원리 속에 스러져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진정으로

의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이나, 풍성한 낙엽이나,

풍성한 결실을 언제 맺었었느냐는 듯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고 있는 겨울나무를 보며

  우리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보며

(生) 의 덧없음을 느끼고,

 

역사 속에 영고성쇠 (榮枯盛衰) 부침 (浮沈) 속에

지나갔던 많은 사실을 보며 허망함을 느낀다.


러나 존재의 밑바닥에서부터 철저하게

무상함을 느끼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만큼 우리 마음이

 탐욕 [貪]·성냄 [瞋]·어리석음 [癡] 으로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정도만큼

오히려 사람들은 영원을 착각한다.

 

 백 년, 천 년을 살 것같이 생각하고,

자기의 부귀와 공명(功名)

영원히 갈 것으로 본다.

 

탐욕 (貪慾) 집착 (執着), 인색과 교만은

이런 생각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제행무상의 도리를

 망각하고 헛된 욕심 속에 잘못된 인생을 살고 있을까?

 

  무상의 원리에서 볼 때, 인생 백 년이

수유 (須臾) 에 불과한 것이며,

잠깐 꿈 속을 헤매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불교의 ‘제행무상’은 중생들의

뒤바뀐[轉倒]착각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것이다.

값싼 감상주의나 비관적인 인생관이 아니다.

 

 다만 올바른 현실 판단 위에 바른 인생관을

정립하고자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자는 것이다.

 

 

2,제법무아 (諸法無我)

  

일체만법 (一切萬法), 다시 말하면

삼라만상 그 모든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我] 라는 자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에게는 비록 형태가 있고

 

 느낌·생각·행동·인식 등의 정신 작용이 있지만

 그 중 영원불멸하는 [我] 라는 실체가 없음을 뜻한다.

제법 (諸法) 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시간적으로 무상한 존재는

 다시 공간적으로 볼 때,

 

 그 어떤 상일주재 (常一主宰)

실체 (實體) 의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시간적으로

 무상하다면, 거기에 불변하는

고정적 실체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여러가지 조건 [因緣] 에 의해

성립된 모든 존재는 ‘그것을 있게끔’

 

한 조건들만 제거되면 사라지는 것으로,

 고집하여 말할 수 있는

 실체 [我] 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객관적 물질 세계는

 지 (地)·(水)·(火)·(風)

 4원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은 (色)·(受)·(想)·(行)·(識)

즉 물질, 감정, 사상의 개념인 오온 (五蘊)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결국 물질의 구성 요소나 인간 (人間)

 구성 요소 그 자체도 영원한 것이 아니며,

 

 자아 (自我) 라는 것도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오온의 일시적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범부 (凡夫), 중생 (衆生)

생각하는 ‘나라는 개념’ 속에는

 

 진정으로 ‘참된 나 [眞我]’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라고 고집하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나누면,

 

 육체적 또는 정신적 요소나

 육체적 정신의 결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것은 모두 지극히 무상 (無常) 한 것이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이

곧 괴로움의 씨앗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상하며 괴롭다.

 

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고 참다운 ‘나’ 자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모든 거짓과 나에 대한

집착과 소유에서 떠날 때

참된 나의 존재는 찬란히 빛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거짓된 나를 참된 나로

 착각하고 고집하는 데서

 

 아집 (我執),아만 (我慢)

 아욕 (我欲) 이 생겨서 번뇌와

 고통 속에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법무아는

 모든 법이 나 [我] 라고 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결론이다.

모든 법,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을뿐,

 그 어떤 것도 고정 불변의

[我] 라는 것이 아니라는 원리이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어우러져

더불어 사는 삼라만상의 도리를

 

 깨닫게 [諸法無我] 되면 인류 세계의 화합과

 평화도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3,일체개고 (一切皆苦)

 

 인생은 (苦) 다. 생·노·병·사와

근심·슬픔·불행·번민은 괴로움[苦]이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것도 고이다.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함도 고다.

결국 인생의 밑바닥은 고를 근저로 하고 있다.

 즉 무상한 것이 인생이며,

무상한 것은 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단안은

제행무상의 판단 위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존께서는 『아함경』의 도처에

 ‘무상한 것은 곧 괴로움’이라 강조하고 계신다.

(苦)에는 그것 자체가 괴로움인 조건에서

 생겨난 감각적인 괴로움인 ‘고고(苦苦)’가 있고,

 

무상한 개체(個體)를 유지하고 존속시키기 위해

애쓰는 데서 생기는 ‘행고(行苦)’가 있으며,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사랑하고

애착하는 것이 파괴될 때 느끼는

 

괴로움인 ‘괴고(壞苦)’가 있다.

이것을 세 가지 괴로움의 모습이라 한다.

이러한 고는 모두 주관적인 것이며

우리의 주관적 감정이 무상한 객관성을

 

무시하고 상주(常住)하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상주하여 주기를

원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주관적 욕망이 원인이 되어

 애착심이 생기고,

 

이 애착심이 많아지면 (取)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

고를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열반적정 (涅槃寂靜) 

 

열반」이란 인도 말「니르바나, Nirvana」의 음역이다.

   「니르」란「불어 끄다」「바나」는「불꽃을 내는 화덕」이다.

   말하자면「화덕의 불을 불어 끄면 적정이 온다」는 말이며,

 곧 열반적정이다.

「적정」은 평화이다.

 

위 삼법인으로 부터 벗어나

모든 괴로움의 번열을 금강같이

 

날카로운 지혜의 힘으로 끈 상태에서

 상락아정에 머뭄을 말함

'卍 불교 공부 卍'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끓어앉기  (0) 2015.05.05
차수(叉手)  (0) 2015.05.05
염불하는 사람의 10가지 마음가짐   (0) 2015.05.05
오역죄 (五逆罪)  (0) 2015.05.05
무재칠시 (無財七施) - 가진 것이 없어도 줄 수 있는 7가지  (0) 2015.05.05